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베르그송 (문단 편집) == 생애 ==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너무 그렇다보니 동료학생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 성격은 평생을 가서 죽기 전까지도 계속 예의 바르고 차분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성적은 발군이어서 항상 학력경시대회 같은데 나가기만 하면 항상 입상이고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른 학력경시 대회의 <교차하는 양 평면에 접하는 구의 면적을 구하라>는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 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고, 그의 수학 스승인 데보브는 자신의 저서에 그의 <파스칼의 세개의 원>문제에 대한 해법을 소개할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놓고 선생님을 배신하고 고등사범학교 입학은 수학이 아니라 철학과로 갔다. 이후 데보브는 '너는 수학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철학자]]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고 했다. 점잖은 어조지만 이는 '''철학자 나부랭이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는 함의를 지닌 말이다. 이에 대해 그는 수학을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그런 과목이라 언급했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강단철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아주 인기있는 대중적 철학자여서 그의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온갖 사교계의 유명인들이 오는 인기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는 교양 있는 귀부인 등이 주로 오는 [[학원]] 비스무리한 곳인데, 그 부인들 수준이 철학자 버금간다. 또한 콜레주 드 프랑스는 그 시대 가장 명망 높은 학자들만이 강단에 서는 곳으로, 딱히 베르그송이 강단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렇다. 후에 프랑스 철학사를 이끄는 에티엔느 질송이나 장 발, 혹은 샤를 페기나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과 같은 시인들이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었다. 나중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다. 역사상 첫 유대인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베르그송은 당대에는 드물게도 이미 국제적인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던 철학자였다. 베르그송의 강의록을 모아놓은 <잡문집>에는 영국,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행한 그의 강연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1913년에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초대로 미국에서 반년 간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 때 베르그송의 강연을 들으러 몰려든 사람들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역사상 첫 교통체증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스탠포드 철학사전에 이 에피소드가 보고되어 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ergson/]] ] 베르그송의 영향력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끊임없이 증가하였다. 특히 1907년 출간된 <창조적 진화>는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는데, 그의 영향력에 우려를 느낀 바티칸 교황청은 1914년 <웃음>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어서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촉구하는 프랑스의 사절단으로 [[우드로 윌슨]]을 만나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윌슨은 베르그송의 팬이었으며, 윌슨의 보좌관은 베르그송에게 "당신이 각하의 선택에 미친 영향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후 윌슨이 꿈꾸던 국제연맹의 학술분과 기구에서 의장직을 맡으며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행위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신경쓰던 사람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으나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기 위해 끝까지 유대교인으로 남기로 결심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신의 임종에는 가톨릭 신부를 불렀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료로 확인할 수는 없다.] 말년에는 [[류머티즘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떨어진 파리에서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비시 프랑스]] 정부의 예외로 해주겠단 말도 무시하고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등록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죽음이다. [[유언]]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 Messieurs, il est cinq heures, le cours est terminé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